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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지시적 순환: 신형섭의 근작들에 대한 기호론적 접근    


홍지석 (단국대 연구교수)  2016

1. 자기-지시 self referential  마운트-오브제 mounted-object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에 따르면 기호는 “다른 무언가를 가리키는 어떤 것”이다. 고대인들은 기호를 “다른 것을 나타내는 그 무엇 aliquid stat pro aliquo"이라 했다. 그러니까 기호란 결국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지시하는refer to“ 모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미술작품은 대부분 기호라 할 수 있다. 우리가 그것을 도상(icon)이라 부르든 상징(symbol)이라 부르든 아니면 지표(Index)라 부르든지 간에 미술작품은 대부분 우리 앞에 그것과 다른 것(그것이 아닌 것)을 가져다 놓는 기호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미술작품은 본질적으로 기만적인, 또는 허깨비 같은 어떤 것이다. 이 기만적인 지시물, 또는 대리물은 항상 뭔가를 우리 앞에 출현시키지만 그 뭔가는 또한 항상 거기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기호로서의 미술작품에서 우리가 절감하는 것은 사실상 궁극적으로 ‘현전’보다는 ‘부재’다. 그것은 있지만 없는 것이다.

 
  모던미술이 ‘자기-지시’를 내걸고 매체나 사물로 돌아갔던 것은 이런 기만적인 상태를 좀 더 정직한(진실한) 상태로 전환시키려는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레디메이드가 현대미술의 존재 방식으로 각광받은 것 역시 이런 문맥에서 검토해볼 수 있다. 레디메이드는 확실히 다른 어떤 것으로 보이기보다는 그 자체로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즉자적으로(literally) 매체나 사물일 수 없다. 매체나 사물이 예술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뒤샹이 그것을 변기가 아니라 “샘”으로 지칭했던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예술이려면 그것은 뭔가를 지시해야 했다. 그 지점에서 모던미술은 “자기-지시”라는 출구를 찾았다. 자기-지시적인 회화나 조각은 과거의 어떤 회화나 조각보다 “정직한” 또는 “진실한” 미술작품일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완전한 것이며 외부의 다른 어떤 것에 존재를 의탁하지 않는다. 의미 수준에서 보자면 그것은 (완전히 의미가 충만한 상태이거나)사실상 무의미한 것이다. 의미하는 바(지시하는 바)가 (거의)없기 때문이다. 
 
  발견한 오브제를 마운트에 삽입하여 슬라이드 프로젝터로 투사/상연하는 신형섭의 작업은 기호의 기만적인 본성을 최소화하거나 제약하려한다는 점에서 모던미술의 연장선에 있는 것 같다. 스크린, 또는 벽면에 투사된 오브제의 이미지는 무언가의 기호, 곧 지시물, 대리물이지만 그것이 지시하는 무언가는 -감춰져 있긴 하지만- 현장에, 그러니까 아주 가까이에 있다. 그것은 슬라이드 환등기의 내부, 슬라이드 마운트에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지시된(referred) 것과 지시하는(referring) 것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기-지시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지시된(referred) 것과 지시하는(referring) 것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는 점에서 “거의” 자기-지시적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슬라이드 필름’으로 지칭할 수밖에 없는 마운트 오브제(mounded object)는 사실상 필름이라기보다는 오브제 자체에 가깝다. 마운트에 삽입된 것은 필름이 아니라 실제 오브제-비닐봉지 조각, 깃털, 북어껍데기, 벌레들-인 것이다. 따라서 벽면에 투사된 깃털은 깃털과 닮은 것이라기보다는 깃털 자체인 것으로 보이고 그 깃털의 떨림은 가상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happening) 사건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에서 여전히 기호다. 


  그리고 이쯤해서 우리는 마운트에 삽입된 오브제들을 좀 더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오브제라 할 만한 것이지만 대부분 무언가를 지시한다는 점에서 오브제인 것만은 아닌 어떤 것들이다. 가령 마운트에 삽입된 비닐조각에 인쇄된 분리배출(또는 경고Warning) 문자들은 다른 무언가를 지시하는 기호다. 그런 의미에서 신형섭이 발견하여 마운트에 삽입한 어떤 오브제들은 또한 발견된 기호로서의 성격도 갖는다. 그렇게 “지시”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으로 계속되고 현전/부재의 “있다/없다” 놀이도 이어진다. 방금 전에 나는 깃털, 북어껍질이나 벌레를 오브제라 했는데 그것은 사실 한 때 지금 여기서 살아 숨 쉬던 생명체의 사체(死體)다. 이 사체들은 한 때 살아 숨 쉬던 어떤 생명체를 지시한다. 특히 신형섭의 작업에서 이 지시기능은 뚜렷하게 부각된 모양새다. 그런데 그것은 기호일까?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 사체, 시체(屍體) 앞에서 우리는 현전보다는 부재를 절감한다. 만약 우리가 그 사체를 기호로서 승인한다면 이 기호야말로 다른 어떤 기호들보다 강도 높게 “부재”의 효과를 산출하는 기호일 것이다. 이 작가는 거기에 “모스키토 세레나데”와 같은 다분히 서정적인 제목을 붙이고 싶어 한다. 

2. 지시의 경로, 자기-지시적 순환 

 

  그런데 벌레의 사체가 야기하는 부재의 효과는 곧장 기호의 지시작용이 산출하는 현전의 효과로 대체되는 모양새다. 즉 “없다”는 느낌은 곧장 “있다”는 느낌으로 전환한다. ‘벌레’에 한정하여 기호 지시작용의 연쇄를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스크린에 투사된 벌레 이미지 ➜ 마운트에 삽입된 벌레(의 사체) ➜ 과거에 살아 숨 쉬던 벌레  

하나의 기호로서 스크린에 투사된 벌레 이미지는 마운트에 삽입된 벌레(의 사체)를 지시한다. 그 벌레(의 사체)는 과거에 살아 숨

쉬던 어떤 벌레를 지시한다. 그런데 지시작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 것 같다. 과거에 살아 숨 쉬던 어떤 벌레란 아무래도 지금 내 눈 앞 스크린에 투사된 벌레이미지와 다를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신형섭이 제시한 수용환경 속에서 관객은 마운트에 삽입된 벌레 사체가 초래한다고 여겨지는 부재의 효과에 사로잡혀 허전함(우울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즉 신형섭이 제시한 환경 속에서 벌레의 사체가 지시하는 ‘과거에 살아 숨 쉬던 어떤 벌레’는 “없다”기 보다는 “있다”고 느껴진다. 그 환경 속에 진입하자마자 관객이 계속해서 대면하는 스크린에 투사된 벌레 이미지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슬라이드 환등의 좀 더 맑고 선명한 영상효과, 그리고 회전하면서 하나 다음에 다른 하나를 보여주는 일종의 영화 효과 때문에 그것은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지시작용의 연쇄는 간단히 직선(의 연쇄)으로 나타낼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도해하는 것이 차라리 적절할 것이다.  

마운트에 삽입된 벌레(의 사체) 

 

스크린에 투사된 벌레 이미지                      과거에 살아 숨 쉬던 벌레  

  이런 지시순환관계의 도해는 신형섭의 ‘분리배출’ 연작에서 수집의 대상이 되었던 ‘분리배출 마크’와 빼닮았다. 실제로 돌고 돌아 처음의 자리(출발점)로 되돌아오는 것들에 대한 신형섭의 애착은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다. 선풍기와 레코드판, 또는 이클립스를 재료 내지 모티프로 사용한 과거와 현재의 작업들이 그러하거니와 문제의 “벌레, Warning문자, 분리배출 문자”등을 다룬 작업에서 슬라이드 환등기가 상연하는 필름(?)은 둥글게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물론 슬라이드 환등기의 릴이 한 바퀴 돌아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오려면 모두 160여 차례의 (재)지시 경로를 거쳐야하지만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신형섭의 작업에서 지시가 결국 자기-지시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모던 예술가들의 작업에서 곧장, 명시적으로 공표됐던 자기-지시는 신형섭의 작업에서는 한참 복잡한 경로를 지나서 기어코 달성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누적된 온갖 지시대상(의미들) 때문에 자기-지시는 본래의 의의와 멀어지는 모양새다. 물론 그것을 자기-지시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에 여전히 신형섭의 작업은 다른 모든 자기-지시적인 작업들과 마찬가지로 정직성, 진실성을 간직할 것이다. 게다가 그것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완전한 자기-충족적 세계를 구성하며 외부의 다른 어떤 것에 존재를 의탁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형섭의 작업을 다른 모든 자기-지시적인 작업에 빗대어 사실상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자기-지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지시하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그만큼 많은 의미를 포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신형섭의 작업이 “어떻든 기어코 자기-지시를 실현하는” 방식으로 모던미술의 진지한 접근태도를 조롱 또는 훼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또는 유희적 상태를 연출하기 위해 자기-지시에 몰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신형섭의 작업을 두고 기호의 지시관계(의 연쇄)를 헤아릴 때의 나의 심정이 마치 3루타와 홈런, 단타를 치고 이제 '히팅 포 더 사이클Hitting for the Cycle‘을 목전에 둔 강타자를 바라보는 마음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마침내 고대하던 안타가 나와 하나의 완전한 자기충족적인 세계가 이뤄진다면 나는 기쁠 것이다. 물론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그 타자는 다음날 또 다시 타석에 들어설 것이고 다시금 ’사이클‘을 완성할 그날을 기약할 것이다. 지금 신형섭의 환등기 작업을 바라보는 내 마음자세가 딱 그렇다.  

     

홍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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